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그 특사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대한제국 [[통감부]]는 한국 법부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기소하고 1907년 7월 20일 [[평리원]]이 [[궐석재판]]을 개정하여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에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그로 떠난 후 생사가 묘연해져 버렸다. 이준 열사의 순국 이후 남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외교 행보를 이어나간 것이 무려 2019년에야 확인되었는데 흥사단 측에서 발굴한 앨리스 아일랜드의 출입국 기록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의 기록을 찾아낸 것. 미국으로 떠나기 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이 인터뷰 내용을 실은 1907년 7월 25일자 <알게마이네 차이통>의 기사가 2019년 3월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는 '''고종황제의 마지막 전언'''을 같이 싣고 "이위종 왕자는 미국에 가서 일본의 한국탄압을 [[시어도어 루스벨트|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고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리고 나서 몇 주 후에 런던으로 돌아와 런던에 회사를 차리고, 대한제국에서 펼치는 일본의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또 "헤이그에서 그들의 임무가 실패했더라도, 그들에 대해 뭐라 말하지 못할 것"이라며 "특히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대표사절단은 한국의 상황에 깊은 동정심을 표했고 도움을 줄 것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인터뷰 말미에 대표단은 고종의 강제퇴위는 일본의 돈과 한국인 변절자들이 만든 것이라 했다"고 전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상설과 이위종은 [[사우샘프턴]]에서 마제스틱호를 타고 1907년 8월 1일 미국 뉴욕항에 도착했으며 입국 심사에서 자신들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소개하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루즈벨트를 만나 친서를 전달하는 건 실패로 돌아간 걸로 보인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7월 19일 '''강제 퇴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